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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ino, Marsilio(1433∼1499)

피렌체 아카데미의 설립자인 피치노는 피렌체 근방의 Figline에서 의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에서 인문과학, 철학 그리고 의학을 공부했지만 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1456년경 그는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했고, 1462년에는 코지모 일 베끼오로부터 Careggi에 있는 집 한채와 여러편의 그리스어 필사본을 받았다.(메체나티스모) 이때를 피렌체 플라톤 아카데미의 설립시기로 본다. 1473년에 피치노는 사제직분을 받았다. 1494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축출된 후, 메디치 가문과 오랜 기간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피치노는 시골에 칩거했다. 사후에 그의 장례식에서 피렌체 공화국의 시장은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추측건데, 피치노는 어거스틴을 연구하던 초기부터 플라톤 철학에 관심을 보인 것 같다. 또한 현존하는 그의 초기작품들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여러 주석가들 그리고 Lucretius에 대해서도 정통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의 피치노의 번역작품들 가운데 널리 읽힌 첫 번째 작품은 헤르메스 뜨리스메지스투스의 작품을 번역한 것이었다.(1463년) 플라톤 작품의 번역작은 1463년에 시작하여 1469년경에 완성되었고, 바로 개정을 한 후 1484년에 처음으로 출간하였다. 플라톤의 "Symposium"(향연)에 대한 피치노의 권위있는 주석서는 1469년에 씌여졌다. 신 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저작에 대한 번역서와 주석서는 1484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1492년에 출판되었는 데, 이것은 18세기까지 사용되었다. 뽀르피리, 얌블리쿠스, 프로클루스 그리고 다른 철학가들의 번역서는 1497년에 발표되었다. 그의 독창적인 저서인 Theologica Platonica de Immortalitate Animarum (플라톤 학파의 신학-영혼의 불멸에 대하여)는 피치노의 작품중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서인데, 1469년에서 1474년 사이에 씌여졌고, 1482년에 출판되었다. 이러한 작품들과 주석서를 제외하고 피치노 철학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그가 1473년경부터 수집하고, 1495년에 출간한 그의 서간집(書簡集)이다. De Christiana Religione(그리스도교에 대하여,1474)같은 그의 논문과 De Vita Libri Tres(인생에 관한 세권의 책, 1489)처럼 의학과 점성술에 대한 그의 작품역시 중요하다.

플라톤과 신 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한 번역서와 주석서 그리고 플라톤주의를 되살리려는 피치노의 의도는 많은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플라톤주의를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피치노의 작품들은 중세시대와 비잔틴 플라톤주의, 이탈리아의 인문주의 그리고 아리스텔레스주의의 전통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토스카나 고유의 언어로 작품을 쓴 단테와 그외의 이탈리아의 시인들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피치노는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끄는 원장이었고, 정신적 지주였으며, 설립자였다. 이 피렌체 아카데미는 르네상스 플라톤주의의 학회이자 플라톤주의의 상징으로 유명했다. 이 아카데미는 기존의 방식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분있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유대로 설립되었다. 피렌체 아카데미에서는 비공식적인 토론이나 회합,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철학에 관한 교훈적인 강연이 정규적으로 있었다.

피치노의 작품들은 직유법과 비유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에게서 인용한 어구로 윤색되어 고도로 복잡한 사상 체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학설중에 일부만이 전해진다.

사랑에 대한 이론

(1) 플라토닉 러브

각 개인의 성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랑에 대한 피치노의 역사적으로 중요성을 가진다. 그의 학설을 살펴보면 피치노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와 전통적인 요소를 결합한 것이다. 피치노는 Syposium과 Phaedrus에서 플라톤이 이야기한 사랑에 대한 이론을 재해석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를 통해서 알게된 고대의 "우정"에 관한 이론들을 결합했으며, 또한 성 바울에 의해 찬미되었던 그리스도의 사랑(카리타스)과 동일시하려 했다. 피치노는 또한 귀도 까발깐띠, 단테 그리고 초기 토스카나 시인들을 통해서 알게된 중세 궁정에서의 사랑의 전통을 가미했다. "플라토닉 러브"와 "쏘크래틱 러브"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피치노의 사랑이론은 16세기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런 용어들은 플라톤의 "심포지엄"과 자신의 서간집(書簡集) 그리고 작품들에 대한 주석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용어는 피치노의 번역에 따르면 플라톤이 묘사한 사랑을 의미한다. 즉, 피치노는 그것을 "신(神)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했다. 피치노는 플라톤과 그리스도교 사랑 개념이 비슷하다고 보면서 인간의 사랑과 우정의 최고형태는 결국 신을 향한 영혼의 사랑에 기초한 만남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피치노는 진정한 사랑이나 우정은 항상 상호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관계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가에 토대를 둔 친교와 공유이고 그것은 신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관계는 두 사람으로 될 수 없고, 반드시 세 사람이 되어야 하는 데 2명은 인간이고, 나머지 한 명은 바로 신(神)이다. 여러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사랑과 우정은 신을 위한 개개인의 사랑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우정을 "유대"라고 생각한 것이 그의 서간문에서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 아카데미를 단지 학교가 아닌 친구들의 공동체로 생각하길 좋아했다.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16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와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서정시인들은 페트라르카와 토스카나 시인들의 영향 뿐만 아니라 피치노의 영향을 반영하는 용어들로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또한 심포지엄에 대한 피치노의 주석으로부터 유래한 "사랑"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나왔고, 수많은 강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피치노에서 시작된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개념이 문학작품들 속에서는 철학적 배경과 분리되어서 더욱 더 희석되고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현대의 독자들에게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개념이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를 다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사상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최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치노에서 시작된 플라토닉 러브를 되집어 보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개인의 사랑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2)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피치노의 사상은 또한 종교에 대한 개념과 철학과 종교사이의 관계에 대한 개념에 관한 것이다. 피치노는 사제였고, 또한 피렌체 대성당의 교회재판소 판사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는 여러 신학작품들과 그리스도교에 대해 사죄하는 형식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의 주장속에는 종교적으로 의심스러운 암시가 내포되어 있고, 그의 작품인 De Vita(1489)에는 점성술과 마술에 대해 위험스러운 관점이 들어있음에 불구하고 그가 정통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주장했고, 교회의 판단을 순순히 받아 들였다. 심지어 그는 그가 좋아하던 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주장이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정면으로 배치될 때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택했다. 여기서 피치노가 모든 종교중에서 가장 완벽한 종교로 그리스도교를 인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는 다른 여러 종교의 장점들을 이야기했고, 무슨 종교라 할지라도 간접적으로 진정한 하나의 신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피치노는 여타 종교에 대해서 이렇듯 관용을 베풀었는데, 그것은 피치노가 자연종교(이신론, 범신론)의 개념과 밀접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에드워드 처버리로 대표되는 17세기의 이신론자들과 범신론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피치노는 신을 섬기는 것이 말이 울거나 개가 짖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했고, 또한 모든 나라에서 종교를 가지는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당연하다고 역설했다. 인간의 지식과 신의 사랑에 바탕을 둔 종교는 동물과 인간이 공유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며, 종교를 가짐으로써 인간은 고귀해지고 뛰어난 존재가 되고, 본성이 나약하고 결점투성이인 인간에 대해 명상 할 수 있는 계기가다 된다고 피치노는 말했다.

(3) 종교와 철학사이의 관계

종교와 철학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피치노는 진정한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참된 철학인 플라톤 철학은 각각 기본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플라톤 철학으로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권위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것이 신의 섭리로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이라 여겼으며, 그리스도교의 은총으로 플라톤 철학이 되살아나리라고 생각했다. 피치노는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 단지 믿음으로만 이루어 진다고 보지 않았고, 이성과 가장 완벽한 철학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고 보았다.

종교와 철학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주장한 피치노에게 플라톤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도록 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헤르메스(헤르메스신, 이집트의 마술의 신, 점성술과 연금술을 창시한 신)와 조로아스터 같은 이교도 신학과 철학도 피치노가 다룰수 있게 하였고, 피치노는 헤브루(유대인)인들의 종교전통만큼 이교도 철학과 신학도 오래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전통과 헤르메스 신학, 플라톤 학파의 철학적 전통은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인류역사의 과정속에서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피치노의 관점과 일치하여 16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스테우쿠스는 "De Philosopia Perenni: 영원한 철학에 대하여, 1542)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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